오늘 이렇게 훌륭하신 분들하고 앞으로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여러 나라의 지도자가 되실 분들과 만나는 좋은 기회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사회공헌에 대한 이야기를 해달라는 부탁을 받았는데 살아온 길에 대한 내용으로 부탁받아서 간단한 대화를 했으면 좋겠습니다. 유익하고 자유로운 대화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처음 한국어를 배울 때 제일 고생한 것이 문법이 너무 달라서 라틴어 계통 언어를 배운 사람들은 비슷하기 때문에 단어 배우는 것이 어렵지 않으나 한국어는 한자를 배우는 것이 한국어를 배우는데 큰 도움이 됩니다. 6개월간 집중적으로 한자를 읽고 쓰는 법을 배우니까 기본적으로 법전까지 읽을 수 있었습니다. 느낌이 안 와요. 가끔 한국 사람들도 명함을 한자를 쓰시는 분들이 계세요. 젊은 사람들은 한자를 읽을 줄 몰라서 제가 대신 읽어주기도 합니다.
제가 미국에서 아이아호라는 주에서 태어났어요. 아이도호는 강원도와 비슷한 동네 감자가 유명해요. 서북부에 위치한 아이다호는 인구는 한남동보다 적고(50-70만명) 대부분 농사를 짓고 살아요. 아버지는 군인이셨어요. 8세에 캘리포니아주로 이사, 중학교까지 캘리포니아에서 자랐어요. 고등학교는 메니소타 주에서 다녔어요. 한국의 지역감정처럼 미국도 지역 간 차이가 심해요. 처음 한국에 온 것이 대학 1학년 때 휴학하고 왔습니다.
하지만 놀러온 것이 아니라 봉사하러 왔습니다. 당시 한국이 어떤 나라인지 어떻게 생겼는지 잘 모르고 옛날에 전쟁이 있었다는 것 정도 알고 있었습니다. 아버지가 군인으로 참전은 하지 않으셨지만 한국전쟁 지원하시다가 직업 군인 생활을 하셨습니다. 어떻게 보면 한국과 가족사와 인연이 깊습니다.
저는 52년도에 태어났습니다. 18세까지 모르다가 본부에서 한국으로 가라는 명령을 받고 1971년 8월 15일 그날을 기억하는 것은 광복절 김포공항에 도착해서 본부가 청운동에 있어서 가는데 태극기가 펄럭이고 사람들이 즐겁게 보내는 기억이 납니다. 71년도에 김포공항 주변에 밭밖에 없었습니다. 농사지을 때 자연 비료를 많이 썼는데 냄새가 많이 났었습니다. 김포공항 도착하자마자 비행기 문을 열자 8월 15일이면 습하고 더운 날씨인데 냄새가 나는데 나는 숨을 들이쉬고 그 냄새를 맡으면서 굉장히 편안한 마음으로 비행기에서 내렸었습니다. 그 마음이 중요한 것 같아요. 제가 불교 신자는 아니지만 전생을 믿어요. 전생에서 한국사람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을 많이 해요. 그만큼 편안하고 안정적이라는 생각을 많이 했어요.. 71년 300불 한국이 가난하고 먹을 것도 없고 서울에서 한달 보내고 경남 마산에서 1년 동안 살았어요. 당시 마산은 가난했습니다.
아기들 돌잔치 원인이 있어요. 그 당시에도 아기들이 태어나면 많이 죽었어요. 100일 지나지 못한 아이들도 많고 병원 갈 돈도 없고 집마다 냉장고 티비도 없지만 희망이 있었어요. 열정도 많았고 한국전쟁 끝나고 얼마 안되서 18년 이산가족 전쟁 분노 정신적 고통이 많이 남아있었어요. 지금보다 일본에 대한 미움도 엄청 강했었어요. 2년 동안 한국에 살면서 느낀 것은 한국 사람들이 정신적 고통 트라우마가 많았다는 것을 알았어요. 부모 형제와 헤어져 살아 계신지도 모르는 사람도 많았어요. 영화 국제시장 여의도광장 이산 가족 찾기 제가 직접 많이 봤고 그런 트라우마가 많이 있었어요. 지금은 많이 극복됐지만. 73년도 귀국 아직까지 어제 일처럼 기억하고 비행기를 타면서 반드시 다시 들어오겠다고 마음먹고 의사로 정신과 의사로 다시 돌아오겠다는 다짐을 했습니다.
정신과 의사로서 한국사람들의 트라우마를 치료하고 싶었어요. 왜냐하면 이런 이야기를 하면 여러분들이 저를 미워하겠지만 제가 미국에서 살면서 고등학교를 70년에 나왔어요. 부자는 아니었지만 굉장히 안전하고 편안한 삶이었어요. 아버지는 군인이라 돈이 많지 않았어요. 학교 다닐 때 스포츠 많이 하고 안경도 쓰고 운동하다가 안경 깨먹고 생각하면 부자는 아니지만 먹을 것 먹고 편안하게 살았어요. 아무 신경 안 쓰고 미래에 대한 걱정 없이 어린 나이를 보냈어요.
그런 환경 속에서 대학을 다니다가 한국에 와서 눈이 완전히 달라졌어요. 한국 사람들을 보며 우리만큼 편안하게 살지 못하는 사람들도 많음을 그때 깨달았어요. 그때는 직행도 없어서 하와이로 갔다가 일본을 거쳐 한국으로 들어왔어요. 배타고 들어가는 사람들도 많았어요. 정보교류도 활발하지 않아서 일반 사람들은 잘 몰랐어요. 한국에 와서야 깨달았어요. 한국 사람들이 저를 성숙시킨 거에요. 그것에 대해 너무 고맙게 생각해요. 정도 배우고 의리. 의리와 정은 영어 단어에 없어요. 없는 이유는 미국사람들은 정이 없어요. 문화 정신 표현할 필요가 없어요. 그래서 만들지 않은 거에요. 굉장히 깊어요. 예를 들면 형은 두 살 위인데 변호사 형은 미국에서 거주하고 저는 한국여자와 결혼해서 한국에 살면서 부모님께는 신 형은 인간성 없다 형은 한국문화를 알지 못하니까 부모님께 용돈도 보내고 미국은 독립적으로 키우니까.
많은 걸 배웠으니까 다시 한국에 와서 갚아야한다 그래서 다시 들어와야 한다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정신과 의사로 돌아오겠다고 대학공부를 시작했어요. 생명 물리학 전공했어요. 너무 힘들고 재미없고 과학 수학 싫어했고 화학 문제 푸는 것이 굉장히 학교 공부하는 걸 싫어했는데 참고 밀어붙이고 했는데 아버지가 군 제대 후 병원 행정 일을 하셨습니다. 그래서 병원을 자주 드나들면서 의사들과 친해지게 되었고 응급실에도 가기도 했습니다. 응급실에서 있으면서 피를 보며 세 번이나 쓰러지기도 하고 해서 전공을 바꿨어요.
역사로 책만 읽고 어렵지도 않고 재미있는 사실도 배우고 엄청 재미있었어요. 대학 3학년 때 전공을 바꾸는 것이 미국에서는 가능해요. 그래서 역사로 졸업했어요. 문제는 역사 학위로는 아무것도 못해요. 박사까지 해서 연구소로 가든가 할 일이 없어요. 그래서 법대가자. 조금 더 공부 해보자 그래서 법대 갔어요.
법대를 갔는데 이거 재미 있더라 사회에 어떻게 들어가는지 뭔가 찌르면 이게 나오고 저기 찌르면 저게 나오고. 변호사 멋지다. 법원에 가는 변호사가 아니라 일을 만드는 변호사 생산적인 변호사가 되고 싶었어요. 졸업하고 그 때 생각난 거에요. 한국에 가서 한국 경제 성장시키는데 도움을 주겠다. 그래서 법대 78년도 졸업하고 한국 오기 위해서 한국은 박정희 정권 당시 경제가 훌륭한 편은 아니었어요. 국제 변호사 사무실이 두 군데 밖에 없었어요. 국제 변호사 사무실 본사가 시카고에 있었어요. 동경으로 보내 달라 동경이 한국 옆이고 한국은 일본경제를 따라가고 있었으니까. 대학에서 일본 역사를 전공했었어요. 일본 가는 것도 흥미를 느꼈어요.
일본 가서 느꼈어요. 일본 사람들이 뭔가 얄밉고 설명할 수 없는 기분이 들어요. 동경에 살면서 자동차가 없어서 지하철을 탔는데 한산할 때 타면 제가 앉으면 일본사람들이 다른 곳으로 가요. 외국인 만나면 혹시 말을 꺼낼까봐 도망가요. 처음에는 기분 나빴지만 일본에 1년 있다가 다시 본사로 갔어요. 한국에 가고 싶어서 일본에 있으면서 77년도 인턴하면서 한국 출장을 갔었어요. 그때 김영우(김앤장 법률사무소 대표)라는 친구를 만났어요. 그때는 유명하지 않았으니까 한국 갈 때 마다 조찬을 같이 했어요. 그때 한국 가고 싶다고 했어요. 한국 와서 같이 변호사 사무실 세 명 있는 곳으로 오라는 제안을 했어요. 나는 30초도 생각안하고 간다고 고맙다고 했어요. 친구들이 미쳤다고 했어요. 미국에서 월급도 좋은데 왜 한국으로 가냐고 미쳤다고 했어요. 그런데 인정 그때 미쳤었어요.
그래서 79년 박정희 대통령 암살되고 80년에 한국에 들어가는데 부모님이 위험하지 않겠느냐고 하셨지만 30년 넘게 있으면서 후회 한 번도 하지 않았어요. 빚 갚을 수 있는 기회가 생겼으니까 변호사로서 제 꿈을 이루어줬어요. 그게 고마웠어요. 물론 부자는 아니지만 미국에서 변호사생활 계속 했었으면 정치인도 하고 돈도 많이 벌었겠지만 그런 후회는 없어요. 뿌듯하고 행복해요. 여러분 사회공헌에 대해 이야기하는데
첫 번째 안정적으로 살 수 있도록 돈을 많이 벌어야 한다. 내 가족이 안전하고 집이 마련되고 먹고 입고 교육받을 것.
두 번째 봉사 하는 것 봉사는 이기적인 것 그것이 행복을 찾게 되는 방법 행복을 잡고 싶어 하는 것 개인적인 욕심을 위해서 사회 공헌하는 것이 행복을 찾는 거에요. 한국에서 유명한 외국인이라고 소개하셨는데 한국에서 처음 10년 간 조용히 경제를 많이 도와줬어요. 미국 기업들 엄청 많이 데리고 왔어요. 합작 투자 미국 기업이 한국을 안전하게 느낄 수 있도록 한국 정부 기업 공무원들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를 설명하고 설득시켰어요. 그러다가 아이엠에프가 터졌어요. 경제 금융 제도를 많이 바꿔야하고 그때 한국제도를 가장 많이 아는 제가 회장하면서 유명해졌어요. 얼굴 팔리면서 타락했어요. (웃음) 자유가 없어졌어요.
좋은 게 회장하면서 투자하고 기업이 들어와 세금 내고 사회적 봉사도 해야 한다 미상공회의소 안에 사회적 봉사단체 설립해서 재단 설립해서 아이엠에프 후 부모들이 학생 등록금을 못내는 거에요. 한국에서 대학 나오지 못하면 취직하기 힘들어서 미래 동반자 재단 설립해서 학생들에게 장학금 주고 있어요. 크게 하지는 못하지만 개인 후원금 받아서 1500명 정도 학생에게 130억 정도 15년 정도 장학금을 주고 있어요. 돈 버는 사업이 아니라 사회봉사를 위해서 미래 동반자 재단 하다가 김은희 국장님을 만나서 로날드맥도날드하우스를 하게 되었어요. 아픈 아이지만 돈이 없어서 치료를 못 받는 아이들에게 치료받을 수 있는 기회를 주고 있어요.
오늘 제 메시지는 하나는 어떤 꿈이라도 꾸세요. 꿈은 있어야 해요. 꿈은 삶의 목적이 생기는 거에요. 목적이 생기면 훌륭해지고 미소가 생기고 열심히 할 수 있는 힘이 생겨요. 공부하는 것도 싫고 학교 가는 것도 싫었지만 열심히 공부해야 기회가 생겨요. 꼭 공부 하세요. 행복하게 살려면 배려해야 해요. 남에게 많이 배려하시면 이기적인 사람들은 불안해하고 싸우게 되고 갈등이 많아요. 식사자리에 제 습관은 제일 낮은 자리로 그게 마음이 편해요. 사진 찍을 때도 가운데가 아니라 맨 끝으로 가요. 누가 나를 올려주면 행복해요. 항상 그런 배려정신으로 살면 행복해요.
오늘 초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행복한 시간이었습니다.
<질의응답>
- 한국에 오겠다고 결심하신 계기
종합적으로 여러 가지 경험하면서 느끼게 된 것입니다. 한국어배우면서 아침에 두 시간씩 공부하면서 문장외우고 바깥에 나가서 배운 문장을 말 해 봐요. 미친놈 온다고 열심히 듣고 한국어 열심히 연습하면서 받아주고 가르쳐줬어요. 그때 TV도 없고 단독주택에서 살았는데 마당 있고 방 두 개 있고 대문 여는 자동 시스템이 없어서 사람들이 가서 열어 줘야 해서 항상 대문이 열려 있어서 주거공간이 다 보여요. 산에서 사는 사람들은 못 사는 사람들. 어느 날 사람들이 흑백 TV를 모여서 보는 거에요. 토요일 밤에 서로 음식 나누고 도와주고 그런 모습들을 보면서 그게 바로 의리와 정이라는 것을 알았어요. 그런 모습을 2년 동안 보면서 느끼고 흡수하면서 점점 알게 된 것입니다. 아기 죽으면 울고 그러면서도 희망을 가지고 또 낳고 일곱 여덟 명 씩 낳고. 한국인사 “밥 먹었어요? 식사는 했어요?” 그때는 먹고 사는 것이 중요했으니까 그런 것들을 보면서 깨달아갔어요.
- 한국을 우리나라라고 부르는 것이 인상 깊었는데 한국의 경제 성장을 지켜보시면서 한국에 현재 필요한 것은 무엇인지
바꾸고 싶은 것 중 하나는 눈치 보는 것. 눈치 때문에 개인적인 창조적인 면이 죽어버려요. 남들이 내 행동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신경 쓰느라 남이 원하는 대로 행동해요. 이기적이 되면 안 되겠지만 조금은 눈치 보지 말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요.
- 법전 한자 필요성. 재단 운영하실 때 수익금 구조 배분구조 자금 마련 후보 선정 기준
재단 두 개를 관여 중입니다. 로날드맥도날드하우스는 맥도날드와 관계되는 곳인데 맥도날드 창업주가 사업을 시작하시면서 이름을 쓸 수 있게 허락해주셨어요. 맥도날드와 관계되어있지만 재정지원을 안 해요. 다른 방법으로 돈을 모으는데 제가 재단 맡으면서 1년에 3, 4억 정도가 개인 후원금으로 들어와요. 좋은 취지니까 돈이 많이 모일 것이라고 생각해서 기업 상대로 후원금을 모으려고 했지만 너무 힘들게 다녔는데도 기부금 많이 못 모았어요. 실패한 거죠. 왜 맥도날드를 후원하느냐는 소리도 들었어요. 그래서 돈 모으는 방법을 바꾸기로 했어요. 한국은 개인 후원금이 많이 모이지 않아요. 그런데 기부문화가 바꾸어야 해요. 크라우드 펀딩을 통해서 기부금 모으려고 기업 후원은 바라지 않으려고 하고 개인 기부를 통해서 돈을 모으려고 해요. 행사로 10월 초 강아지 패션쇼도 하려고 해요. 조금씩 시간이 걸리더라도 그렇게 가려고 해요. 관심 있으신 분들의 많은 참여 부탁드립니다.
- 한국 사회에 많이 공헌하셨다고 하셨는데 자메이카도 많은 문제들이 있어서 자메이카가 경제 성장하고 도와줄 수 있는지에 대한 질문
첫 번째 교육 한국이 성장을 크게 할 수 있는 원인은 교육 99.9% 고졸 70%이상 대졸 교육에 대한 열정을 키워줘야 해요. 자메이카 경제제도 자본주의 사회주의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정부가 부패하면 안 돼요. 엔지오 설립 자메이카 교육에 대한 열정을 키워주는 정부 부패하지 않도록 감시하는 엔지오 설립을 목표로 하면 좋을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