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십니까? 저는 오니시 켄스케입니다.
시작하기 전에 저희 둘 소개를 드리겠습니다.
먼저 저는 1967년 5월에 오사카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는 신문기자, 어머니는 가정주부로 평범한 중산층 집안이었습니다. 부유하지는 않았지만 학문을 배우는데 돈을 아끼는 집안은 아니었습니다.
도쿄대학을 들어가고 나와 취직을 하는 게 간단한 시대였기 때문에 취직하는데 문제가 있는 상황은 아니었습니다. 제가 변한 것은 20살이 되던 해 아버지가 식물인간으로 쓰러지면서 시작되었습니다. 대학을 그만두어야 하나 고민하고 있었는데 어머니의 반대로 아르바이트와 장학금을 받아 대학을 졸업할 수 있었습니다. 졸업을 하던 해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보험금이 나왔습니다. 어머니가 유학을 보내주겠다고 하셔서 영국으로 유학을 갈수 있었습니다.
영국에서 공부한 것은 후생계열이었는데 일본에서는 공부할 수 없어서 유학을 가게 되었고, 제가 쓴 논문은 이라크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제가 논문을 쓰면서 깨달은 것인데 아무도 이라크에 들어가서 쓰지 않고 안에서 나오는 문서들을 가지고 논문을 쓴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어떤 학자도 실제 이라크에서 연구하지 않은 것을 알았기 때문에 그것을 가지고 논문을 써봤자 그건 거짓말 밖에 되지 않는다고 생각해서 터키를 통해 이라크로 밀입국하게 되었습니다. 프레젠테이션은 이라크로 들어간 이후의 이야기입니다.
여기 통역사는 제가 6년 전에 한국에서 심포지엄에 왔을 때 봉사자로 만났습니다. 영어통역을 주로 하던 여학생이 있었는데 다음날 갑자기 남자로 바뀌었습니다. 저는 우연이라고 생각했지만 나중에 들으니까 통역사가 억지로 바꿨다고 들었습니다. 점심식사를 함께 하다가 능력 있다고 생각해 시험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저녁식사에 초대해 부대찌개를 먹다가 일본으로 오겠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때 통역사가 1.5초도 되지 않고 가겠다고 대답했습니다. 제가 시험해보고 싶었던 포인트는 의사결정이 빠르게 되는지, 용기가 있는지 였습니다. 그래서 제가 일본으로 돌아가고 2주 뒤에 일본대지진이 일어났는데 그때 당시 방사능지역에 들어가서 활동을 하고 통역사가 어머니로부터 울면서 돌아오면 좋겠다는 전화를 받고 도쿄에 있다는 거짓말을 해서 안심시킨 적이 있습니다. 그때 일본에 가기로 결정한 것이 잘한 것인지 정말로 행복한 일인지 보장할 수는 없지만 대표로서 저는 좋은 인재를 얻게 되어 행복하다고 생각합니다.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겠습니다. 제가 북부 이라크로 들어가 사업을 시작할 때 가장 놀랐던 것은 NGO의 힘이 얼마나 큰지 였습니다. 정부나 유엔에서 하는 것보다 NGO의 활동이 더 컸습니다. 저도 일본의 작은 엔지오 단체에서 일을 시작했기 때문에 그때 당시 사진입니다.
초등학교 설립하기 위해 땅을 팠더니 많은 백골들이 발견되었습니다. 당시 신분을 확인해보니 1988년 이라크군에 의해 사라진 사람들의 유골이었습니다. 사망한 사람들의 사진을 가지고 와서 BBC에 항의하는 모습입니다.
걸프전 이전부터 시작해서 백만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아직 발견되고 있지 않습니다. 우리 사무실에도 이맘때 총격전이 있었기 때문에 아침에 일어나서 얼마나 많은 총탄을 맞았는지 확인하는 것이 첫 일과였습니다. 차를 타고 길거리를 돌아다니다 보면 죽어있는 사람들을 많이 발견할 수 있는데 그 중 한 사람입니다.
병원으로 이송했지만 죽고 말았습니다. 이 사람들은 사무실을 습격하러 온 게릴라들입니다. 우리 사무실은 옆 건물을 방화한 다음에 왔습니다. 당시에 게릴라군의 보스를 알고 있었기 때문에 당신들의 보스를 알고 있으니 습격한 것을 알면 문제가 생길 것이라고 말했더니 웃으면서 지나간 것을 제가 직접 찍은 사진입니다.
게릴라군의 보스는 이라크의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2천만 개 정도의 대인지뢰들이 남아있습니다. 지금 사진에 나오는 아이는 지뢰를 밟아 다리를 잃어서 학교를 다닐 수 없어서 이 마을에 학교를 건설해주었습니다. 15년 후 마을 가까이 갔을 때 다리를 없는 청년이 불러서 돌아보니 다리가 없어서 학교를 못 갈 뻔 했던 아이가 우리가 설립한 학교를 다니고 대학교까지 나와 자신이 졸업한 학교에서 교사를 하고 있었습니다.
저도 대인지뢰를 밟은 적이 있는데 운이 좋게 불발되었는데 원래는 0.5초 후에 폭발합니다. 그때 당시 제가 느낀 것은 일본의 엔지오가 매우 작고 물자가 유럽이나 미국에 비해 적어서 학교를 짓고 식량을 전해주는 것이 전부였습니다. 당시 일반 엔지오에 대해 기부나 정부의 지원을 기대할 수 없고 법률도 없는 상태였습니다. 당시만 해도 월급이 있습니까하고 묻는 게 무서울 정도로 가난한 상황이었습니다. 고향 주변 아주머니한테 유학까지 다녀와 돈도 못 번다는 소리를 듣곤 했습니다. 질문 받겠습니다.
제가 이렇게 2년 동안 무보수로 활동해보니까 이런 활동을 할 수 있는 사람은 두 부류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돈이 정말 많거나 머리가 이상하거나. 보통사람들이 원조지역에서 활동하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일정한 월급을 지불해주어야 하는데 어떻게 하면 그런 조직을 만들 수 있을까 생각해보니 사업이나 인건비 이외에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는 일정 금액 이상의 보증을 받을 수 있는 사업적인 형태가 필요하지 않나 생각해서 그런 기업을 만들기 위해 15년간 해왔던 일들이 많이 있습니다. 당시에 모순이라고 생각한 점은 만일 일본이 돈이 없는 나라라면 엔지오가 활발히 활동하지 않는 것도 이해할 수 있을 텐데 당시 일본 정부는 ODA 자금이 세계 1위라고 선언할 때였습니다. 왜 이런 모순이 생겼을까 생각하고 있습니다. 정부에 기대는 것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 혁신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제가 가지고 있는 하나의 단체를 바꿔나가는 것도 힘든 때였지만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사회적인 환경을 자체를 바꿀 필요가 있다는 생각을 하고 그것을 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다음 혁신적인 부분을 이야기해보겠습니다. 사회적인 문제의 근원은 우리단체가 정통성이 없고 사회분위기가 성숙되어있지 않았다는데 있었습니다. 정통성을 다른 곳에서 빌려와서 사회적인 인프라를 구축하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이런 국제 업무는 외무성으로 가야겠다는 생각을 하겠지만 저는 조금 반대로 생각해서 경단련(우리나라의 전경련)을 찾아갔습니다. 경제단체를 찾아가 새로운 조직이 필요하다는 점을 어필하고 그것을 위해 일본경제신문(미디어)의 도움을 받아 경제계와 협력하는 쪽으로 이야기를 진행했습니다. 그 다음으로 정부를 찾아갔는데 외무성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돈을 줄 수 있는 한국으로 치면 기획재정부를 찾아가게 되었습니다. 재무성을 찾아가고 외무성을 찾아갈 수 있었던 배경에는 20살 정도의 젊은이의 이야기를 들어준 데에는 전후 국제환경에 좋은 영향력을 끼치지 않았던 그리고 그런 영향력을 끼쳐야 한다는 사회적인 분위기가 전반적으로 형성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일본과 한국은 문화적으로 비슷한 부분이 많이 있기 때문에 여러분에게 중요한 포인트가 여기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젊은 청년이 사회를 위해서 열심히 일하는 모습을 보면 사회지도층을 만날 수 있고 한국에서도 좋은 평가를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해서 대기업 회장이나 재무성 고위관료, 경단련의 회장 등 젊은 사람이 쉽게 볼 수 없는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이런 플랫폼이란 단체를 만들어서 12년 간 4천억 원 정도의 자금이 흘러 들어갔고 최근 세계에서 60개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아주 젊은 청년의 아이디어로 시작된 조직이 지금 15년간 많은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기반이 되었습니다. 중요한 포인트를 알려드리자면 저희는 절대로 외무성과 일대일 관계를 만들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일대일로는 거대한 조직을 이길 수 없기 때문에 외무성 이외에도 재무성, 미디어, 학계 등 여러 사람들을 모아서 힘의 균형을 만드는 작용을 하였습니다. 이런 힘의 균형을 이루는 작업에 대해 힌트를 준 것은 19세기 비스마르크의 정책입니다. 지금은 플랫폼에 47개 단체가 가입되어 있습니다.
2001년에 911테러가 있었습니다. 테러가 있기 3개월 전에 아프가니스탄에 들어가 탈레반과 난민캠프를 지원하는 사업을 진행한 적이 있습니다. 지평선 끝까지 난민캠프인데 피난민들이 직접 만드는 텐트고 물도 오염되어있어서 많은 아이들이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현지 활동하던 크리스천 계열 엔지오들이 탈레반에 의해서 추방당해서 일본엔지오로서 활동을 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협상 후 사업을 시작할 때 테러가 나고 전쟁이 시작되었습니다. 전쟁 중에 사업을 지속해서 모든 텐트를 개조하고 의료 식량지원을 할 수 있었습니다. 엔지오 하나의 힘이 아니라 제가 따로 만들었던 재팬 플랫폼이란 조직을 통해 대량의 물자 이송 가능하게 되었고 이것은 하나의 예에 불과하고 당시 7개 단체가 더 활동하고 있었습니다. 젊은 경영자라고 하면 보통 자기 단체의 경영에 집중하기 마련인데 그럴 것이 아니라 생각하기 어렵긴 하지만 사회적인 인프라를 통해 사회 모두에게 이득이 되게 하는 넓은 눈을 가지는 전략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물자를 이송하는 방법에는 두 가지가 있었습니다. 하나는 비행기를 통해 이동하고 트럭으로 많은 것들을 이송했는데 트럭이 낭떠러지에 걸린다거나 트럭이 폭발하는 등의 사고가 있어서 여러 사람이 죽는 그런 일들도 있었습니다. 4100미터가 넘는 산을 오르는 일이었기 때문에 가장 큰 수송기를 40대 정도 사용하였습니다. 전부 비행기로만 이송시키면 편하지 않느냐고 하지만 그렇게 되면 비행기를 빌리는 값이 너무 비싸서 실질적으로 물자를 구입하는 비용이 줄어들기 때문에 4대6 정도가 적절한 비율이었습니다. 당시 재팬 플랫폼을 설립한 이후 꾸준히 성장하여 피스 메이크 재팬을 보자면 20억 원으로 시작하여 400억 원의 단체로 성장하였습니다. 당연히 재팬 플랫폼의 자금만 사용한 것이 아니라 다른 일반 기구나 단체들의 도움을 많이 받았습니다. 재팬 플랫폼은 지금 연간 예산이 700억 원입니다.
유럽에 비해 뒤늦게 발전한 아시아 국가로서 권위적인 사회 분위기 속에서 어떻게 시민사회를 사회적인 혁신단체로 만들어 갈 것인가에 대해 고민을 하게 되었습니다. 일본의 과제는 한국의 과제이기도 합니다. 한국뿐만 아니라 유학생 여러 국가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사진 속 사람이 당시 외무대신과 음지의 외무대신이라 불리던 권력자입니다. 2001년 재팬 플랫폼이 아프가니스탄에서 많은 활동을 한 것을 두고 일본에서 역공을 당한 부분이 있었습니다. 음지외무대신이 재팬 플랫폼의 활동에 많은 질투를 느끼고 괴롭힘이 있었습니다. 일본에서 중요한 회의가 있었는데 새벽까지 참가가 예정되어있었지만 새벽 1시 50분에 모든 엔지오의 참가가 거부당했습니다. 모두 권력자의 거부 때문이었습니다. 보통 엔지오 활동가였다면 그 자리에서 울고 말았을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는 것이 아니라 반격을 했습니다. 당시 조사능력을 발휘해 권력자가 얼마나 많은 뇌물을 받았고 어떤 압력을 했는지 조사해 기자회견에서 발표하였습니다. 기자회견 이후 국회에 불려갔습니다. NHK에서 생방송을 했는데 월요일 아침 9시에 했음에도 2천만명이 봤고 지금까지 국회 방송 중에서 가장 높은 시청률이었습니다. 결과를 말씀드리자면 권력자는 3년간 형무소에 있게 되었습니다. 외무성에서 원투쓰리 관료들이 잘렸습니다.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저희 승리로 끝났지만 우리로서도 분쟁해결을 배운 것을 활용할 수 있었습니다. 당시 공부할 때는 분쟁을 멈추고 조정하는 것을 배웠는데 당시 분쟁 당사자로서 공부한 것을 응용할 수 있었습니다. 학문도 가끔은 도움이 됩니다. 분쟁을 한번 일으키면 분쟁비용이 발생해서 이후 10년간 악플이 달리는 것을 지금도 겪고 있습니다.
이 사건을 통해서 재팬 플랫폼의 설립자로서 맡고 있던 대표이사를 그만두었습니다. 처음에는 8년간 하고 싶었지만 5년 만에 그만두었습니다. 일본에서는 사회적으로 정의는 통용되지 않고 분쟁을 일으킨 사람은 그만둠으로써 책임을 지는 분위기입니다. 계속 수면위로 올라가 있으면 싸움이 일어날 테니 수면 아래로 가라앉아 있으며 지켜보려고 마음을 먹었습니다. 이것도 대학원에서 배운 것입니다. 다른 이야기가 많이 있으니 이쯤에서 질문을 받고 넘어가겠습니다.
일본 정치가들과의 분쟁으로 그만둔 재팬 플랫폼도 올해 다시 대표이사로 돌아왔습니다. 저로서는 10년간 같이 있지 못한 안타까움이 있지만 아직 조직이 남아있고 앞으로 더 성장시킬 수 있는 기회가 있다는 것에 감사하고 있습니다. 그 당시 싸움은 정치인과의 싸움이 아니라 뒤에 야쿠자들이 있었습니다. 이 일 당시 살해위협이 있으니 야쿠자들을 조심하라는 경고를 몇 번 들으며 일을 진행했습니다. 일본공항에 갈 때마다 너 죽을 수도 있다는 이야기를 들으며 이미 이라크에서 기관소총도 맞아보고 자동소총도 경험했기 때문에 상관없다고 말해주었습니다. 2000년 초반에서 올라와 일본대지진부터 이야기 하려고 합니다.
재팬 플랫폼은 원래 국제적인 사업을 위한 것이지만 제가 그만두기 직전에 정관을 고쳐서 국내도 사업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국내 지진도 당연히 대응할 수 있을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사람의 마인드 셋이 얼마나 강력한지 느낄 수 있었던 것이 한번 국제협력을 위한 것이라고 생각하니 국내업무는 나의 영역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일본인만의 경향일지도 모르지만 한국도 문화적으로 비슷하기 때문에 비슷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합니다. 사람이라는 건 한번 이 분야에서 일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면 다른 분야로 가는 것이 힘들어지는 경향이 있습니다. 재팬 플랫폼 만으로는 위험하다고 생각해서 제가 지진 문헌을 읽은 결과 일본에서 대지진이 일어날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해 일본 국내에 지진에 대처할 수 있는 단체를 만들어야 한다 라고 생각했습니다.
지금 사진은 지진 다음날 헬리콥터를 타고 현장에 가서 찍은 것입니다. 그래서 아직도 불에 타고 있는 모습입니다. 제가 국내를 위한 플랫폼을 만들겠다고 판단했을 때 민주당 정권의 위원으로 위촉되었습니다. 처음으로 열린 총리원탁회의에서 제가 처음 이야기 했던 것이 대규모 재해에 대비해서 민간단체의 힘을 빌려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총리와 매주 회의하면서 구체적인 정부사업안을 만들고 있었는데 안타깝게도 총리가 9개월 만에 사임하였습니다. 여기서 제가 배운 것은 정치인에 기대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안정적인 정권이 아니면 국민을 위한 실질적인 사업을 추진하는 것은 어렵겠다는 것을 깨닫고 유동적인 정치게임 안에서 사업을 하는 것은 어렵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당시만 해도 제가 가지고 있던 단체 색깔로는 진보정당에 가까웠지만 10년 이상 활동하면서 자민당과도 많은 연결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정부의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것은 정권과 이야기해서 해결하고 있지만 정부에 기대지 않고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스스로 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일본대지진이 있기 전에 이미 재난현장에 가기 위해서는 헬리콥터가 있어야 접근이 가능하다고 생각해서 헬리콥터 회사와 연결을 진행하고 있었습니다. 헬리콥터 회사와 이야기를 했을 당시 문제가 생겼을 때 원래는 방송사 전력회사 등에 우선적으로 위탁되지만 저희는 우선 헬리콥터 3대를 사용할 수 있는 MOU를 맺은 상태였습니다. 세 대를 사용해서 조사사업을 하고 물자를 옮기고 인도적 지원을 위한 직원을 파견하고 정부가 할 수 없는, 정부가 들어갈 수 없는 지역에 들어가 상황을 정부에 보고하는 사업을 진행했습니다.
불탄 슈퍼마켓 옥상에 핼리콥터를 착륙시키는 일도 있었습니다. 한 번에 많은 사람이 죽어서 한꺼번에 화장을 할 수 없기 때문에 시신을 냉동보관하기도 했습니다. 다른 지역에서 이런 일이 일어나면 시신관리가 되지 않아 냄새가 많이 나기 마련인데 이때 날씨가 추워서 큰 냄새는 나지 않았지만 체육관에 시신을 쌓아놓는 상태였습니다.
당시 원전사고가 있었기 때문에 방사선에 노출되지 않도록 방호복을 입은 상태입니다. 제가 현장에 보내면서 제일 확인하고 싶은 것은 지혜나 체력이 아닌 현장에서 자신을 잃지 않는 정신력이나 용기 같은 것이었습니다. 아무리 평상시에 지혜가 있고 체력이 있어도 위기상황에 용기를 가지지 못한다면 모든 능력에 곱하기 제로를 해야 하는 상황이 됩니다.
제가 정의하는 사회적 리더십이란 본인의 리스크를 알고 있으면서 사회적인 활동을 진행하는 것입니다. 지진 직전에 만든 작은 단체라 원래 30개 회사로 연계되어 있었지만 지진직후 SNS를 통해서 천개가 넘는 기업으로부터 지원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트럭을 정부에 의해 지원받았기 때문에 이삿짐회사와 연계해서 실제 물자를 83만 18만개의 옷을 전달할 수 있었습니다. 전부 기부와 무상지원을 활용해서 했습니다. 정부원조보다 빠르게 옮길 수 있었고 정부는 하지 못한 여성 생리용품이나 아기 기저귀 등 좀 더 구체적인 품목을 전달할 수 있었습니다. SNS를 통해 3개월간 300억 원이 모금되었습니다.
이런 경험을 통해 비즈니스 영역 기업을 활용하는 것이 얼마나 큰 도움이 되는지 확인 할 수 있었고 여러 분야가 협력해서 일하는 것을 통해 더 큰 물자이동이 가능하고 거기에 더해 일본이 일방적으로 기부하는 것이 아니라 동남아시아 등지에서 도움을 주고받을 수 있다는 것을 깨닫는 계기가 되었고 이것이 자연재해뿐만 아니라 분쟁이나 전쟁, 전쟁 이후 피난민 지원 등 분야에서 아시아 국가들이 서로 도우며 활동을 지속해나갈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아시아 각 국가에 플랫폼 형식을 전수함으로써 상호 협력하는 조직을 만들려고 합니다. 오랫동안 만든 유엔 단체 구조와 비교해서 훨씬 혁신적인 모델이라고 생각하고 일본정부에서도 이것을 인정해서 자금을 지원받을 수 있었습니다. 지금까지 있었던 국제기구 정부역할에 벗어나서 새로운 혁신적인 모델을 만들어서 국제적인 지역 영역에 들어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앞으로 하려고 하는 소셜 비즈니스라고 하는 새로운 사업에 대해 알려드리겠습니다. 일본 보건복지부에서 진행하는 위원회인데 미래 일본 보건복지부에 관한 보고서를 작성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이 사진에 있는 사람이 일본 후생노동성 장관인데 8월 24일에 한국 국회의원을 초청해서 일본에서 포럼을 여는데 주요 참석자입니다. 국제의원연맹을 진행하는데 거기 메인멤버이기도 하고 젋은 사람들을 좋아해서 여러분들이 일본에 오시면 같이 파티도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제 옆에 있는 사람이 피스 이사진인데 도쿄대 교수이고 의료부분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일본 산간지역은 인구가 줄고 있고 의사가 가지 않는 경향도 있어서 이런 부분을 해결하기 위해 의사 네트워크를 통해 의료지원을 하는 사업을 진행 중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국내외 큰 재해가 발생했을 때 바로 파견되어 의료봉사를 할 수 있도록 진행하고 있습니다.
또한 구조견이나 보호견을 양성하는 사업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히로시마 현에서 매년 8600마리의 개가 살처분 된다는 일에 쇼크를 받아 이때까지 한 사업과는 다른 영역이지만 개를 보호하는 사업을 하고 있습니다. 제가 살처분하는 시설에 방문했는데 가스실에서 넣어서 한 번에 죽이는데 5-10분정도 괴로워하다가 죽어나가는데 그런 모습을 보며 일본 의식수준이 이런 부분에 대해서는 아직 진전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굉장히 화가 났고 살처분 제로를 만들겠다는 선언을 했습니다.
우리 단체는 국제인도단체인데 왜 개를 보호하는 사업을 해야 하는지에 대해 내부의 반대가 컸었고 최초 15억을 지원해 사업을 했을 때 반대하며 많은 스태프들이 떠나기도 했습니다. 여기서 다시 마인드 셋이라는 저주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도 힘을 내서 올해 4월부터는 살처분되는 개가 제로가 되었습니다.
제가 했던 방법은 미디어를 불러 기자회견장에서 천일이내에 살처분 제로를 만들겠다는 선언을 하였습니다. 미디어로부터 무리라고 머리가 어떻게 된 게 아니냐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미디어는 그렇게 이야기했지만 많은 사람들이 공감해주었고 1년 동안 60억 원을 모금해주어 지금의 사업을 일으킬 수 있었습니다.
올해부터는 이때까지 고양이를 보호하는 단체를 지원금을 지원하는데 그 단체도 고양이 살처분 제로를 만드는 사업을 시행하게 되었습니다. 일본 현(지방자치단체)에서 개 고양이 살처분 제로가 된 것은 저희가 유일합니다. 정부 지원이 하나도 없었지만 이런 일을 일으킬 수 있었습니다. 이때까지 살처분이 제일 많은 것으로 유명했던 히로시마 현이 제로가 된 것에 대해 일본에서는 유명한 이야기가 되서 히로시마의 기적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사업을 통해 구해진 개들은 훈련소로 보내 구조견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이 사람은 히로시마 지사인데 개를 구하는 것에는 관심이 없지만 관광 사업에는 관심이 있어서 저와 함께 일하고 있습니다. 프린스턴대에서 MBA를 했는데 뭘 배웠는지 모르겠습니다.
이런 것들을 해서 히로시마 현에서 현대예술에 관한 사업도 진행하고 있습니다. 생명의 소중함을 알리기 위한 테마파크로서 동물들을 기르고 생명의 존엄성을 알리는 곳입니다. 콘셉트라고 하면 어릴 때부터 괴롭힘을 당해온 동물의 입장이 되보고 남의 입장이 되어보는 학습을 통해 공감능력을 기르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지금 버려진 개들뿐만 아니라 쓸모가 없어져 버려진 소도 기르고 그 소에게서 얻은 우유로 아이스크림을 만드는데 히로시마에서 가장 맛있는 아이스크림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꼭 먹으로 오시기 바랍니다.
관광 사업에 관한 이야기인데 일본 무인도를 개발하여 크루즈 선을 마련하고 고급 게스트 하우스를 만들어 일본 지역 관광 사업 개발을 하고 있습니다. 유명한 현대 예술가가 무료로 작품을 기증해주어 섬에 현대미술관을 건립하였습니다. 미술관을 보기 위해 사람들이 많이 방문합니다. 결론을 말씀드리면 마케팅의 어려운 부분을 설명할 수는 없지만 국제협력분야 이외의 분야를 진행함으로써 거기에 동감한 사람들이 국제협력분야에도 협력을 하는 결과가 이루어지고 있고 그것으로 인해 단체의 성장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일본 내 많은 연예인들도 지원을 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감사합니다.